박찬욱 감독의 첫 TV 연출작인 더 리틀 드러머 걸의 감독판을 봤다. 원작은 1983년 발표된 첩보소설인 존 르 카레의 동명의 베스트셀러이고 작년에 BBC ONE과 AMC에서 이미 방영을 한 바 있다. 이번에 새롭게 편집된 감독판은 한국에서 왓챠 플레이로 전세계 최초로 공개되었다.
요약

* 줄거리 (스포일러)
1979년 어느날, 서독의 본 부근의 외교관 거주구인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이스라엘 대사관원을 상대로 한 테러가 발생한다. 테러의 목표물은 노무관과 그의 삼촌인 정통파 유대교학자였는데, 노무관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대신 그의 어린 아들과 삼촌은 사망한다.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인 모사드는 독일에 도착한 후 대 테러리스트 전담팀을 꾸린다. 전담팀의 리더인 마티7마티: 마틴 커츠(마이클 섀넌)는 영국의 무명 연극배우를 포섭해서 적의 네트워크 조직에 침투시킨 후 테러리스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치밀한 각본을 짜기 시작한다.
드라마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모사드가 무명의 연극배우 챠미안 찰리 로스(플로렌스 퓨)를 포섭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이후 본격적으로 포섭된 찰리가 스파이활동을 하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중심적인 줄거리 안에서 더 리틀 드러머 걸은 몇가지 키워드에 따라서 관객에게 생각할 꺼리를 안겨준다.
7가지 키워드로 본 더 리틀 드러머 걸
시오니즘과 알 나크바
더 리틀 드러머걸은 전체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중동의 분쟁을 배경으로 스파이들 간의 첩보전을 다루고 있다. 시오니즘8시오니즘: 유대인 국가건설을 위한 유대민족주의운동에 뿌리를 둔 이스라엘의 건국(1948년)과 그로 인한 알 나크바9알 나크바: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인한 팔레스타인지역의 대규모 난민 발생을 일컫는다.(대재앙)와 함께 시작된 두 집단 간의 분쟁의 근원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엿볼수 있고 또한 흔히 이슬람은 테러리스트이자 악이라는 전형적인 시각에서는 약간 빗겨나 있다. 이야기는 이스라엘 첩보기관인 모사드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간의 대결구도를 통해 전개되는데, 주로 모사드 입장에서 그려지고 있다.
박찬욱
사실 박찬욱 감독의 열혈한 팬은 아니지만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은 흥미롭게 봤다. 그래서 그가 스파이물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내심 관심이 갔다.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미학적인 미장센과 카메라워크, 인간의 찌질함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주제의식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첨가된 일부 불편한 장면과 같은 요소들은 그의 첫 드라마 연출작인 더 리틀 드라마 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중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초반 폭탄의 조립부터 그것이 운반되는 일련의 씬들이었는데, 디테일이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느낌을 받았다. 녹색의 색상이 많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은 녹색의 물감이 포인트색으로 들어간 강렬한 유화를 보는 듯 하다. 연이어서 녹색의 의자, 녹색점퍼를 입은 테러리스트, 녹색 옷을 입은 행인 등등이 등장할 때는 마치 물감통을 고의로 엎지른 것처럼 편집광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거기다가 보색대비를 적절히 쓰면서 당시의 패션과 유행칼라를 고스란히 전달하면서 관객을 1970년대 말의 시간속에 존재하는 듯 느끼게 한다.
박찬욱의 이번 스파이 드라마는 스파이물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액션과 서스펜스가 관객에게 주는 카타르시스가 중요한데 – 대표적으로 본 시리즈가 떠오른다. – 아트필름적인 요소가 다분한 그의 작품은 지향점이 달랐고 – 누군가에게는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 대신 장르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다.
페르소나10페르소나: persona : 가면을 쓴 여배우
드라마는 여배우 찰리가 포섭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현실 속에서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가면을 한 두 개씩은 쓰고 산다. 예를 든다면, 그 가면은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선생님 일수도 있고 일 잘하는 신입사원, 엄친아 우등생,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등등으로 다양하다. 극 중에서 찰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좌파 운동권에 몸담고 있는 여배우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물론 나중에 그녀의 가면의 진실은 적나라하게 벗겨진다.
극 중 마티의 모사드팀은 찰리를 포섭하기 위해서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는 데 그녀가 현실속에서 그동안 가면을 쓴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교시절 퇴학당한 일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가면은 자신의 평범하고 무료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을 보다 극적인 인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가면 –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사기범죄자(?)인 연극배우, 이상주의적 급진 좌파 운동권, 자유분방한 파티광 – 을 쓴 채로 산다. 이러한 그녀의 페르소나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살면서 필요할 때 마다 쓰게 되는 일종의 가면이다.
모사드팀은 자신이 진짜 극적인 인물이 되고자 하는 혹은 진짜 멋진 연기자가 되고 싶은 그녀의 속마음을 공략해서 – 탁상공론을 하는 이상주의자인 그녀를 현실의 행동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하면서 – 그녀를 결국 스파이 연극의 주연으로 섭외하는데 성공한다.
현실의 극장11현실의 극장: theatre of the real
현실의 극장이라는 표현은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한 메타포이다. 찰리는 여배우로서 현실의 극장에서 연기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로 무료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도피수단으로 거짓의 가면을 쓰면서 살아왔던 그녀에게 진짜(?) 삶을 한번 살아 보라 – 내가 너에게 인생의 진짜 쓴맛 단맛 한번 맛보게 해줄께!- 는 일종의 장치이다.
이후 찰리는 모사드의 스파이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기의 연기와 같았던 현실에서 벗어난 진짜 현실의 희노애락을 느끼게 된다. 비로소 한번 뿐인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된 것인데, 관객 또한 현실의 무게감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과연 그녀는 그 속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을까?
반면에 테러리스트들 칼릴, 쌀림 형제에게 현실의 극장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써 테러의 무대이다.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에 비해 전력이 뒤쳐지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야 통한다고 주장하면서 테러행위를 정당화한다.
더 리틀 드러머 걸12더 리틀 드러머 걸: 북치는 소녀

드라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코멘더 픽튼(찰스 댄스)과 마티의 대화 씬이다. 닭 장 속의 닭에게 모이를 주면서 픽튼은 1947년 자신의 신참시절을 회고한다. 골란고원의 어느 마을에서 이스라엘 소년병들이 자기 부하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의 한 소년을 체포한 후 공범의 이름을 실토하라고 손이 피로 젖을 정도로 강하게 신문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풀어 주게 된다. 그는 그 당시 자신의 뇌리를 스쳤던 어떤 생각을 다시 떠올린다. – ‘내가 북치는 소년을 하나 만들어 냈구나. 다음 전투에 뛰어나가 북을 두드려 댈 녀석을’. 그리고 그 애들 절반은 실제로 이르군 – 시오니스트 무장조직 – 에 들어갔고 다음 해에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을 일으켰다고 언급한다.
이 장면은 작가의 비판의식이 담겨있는데, 결국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적인 징벌은 평화를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단지 북치는 어린 소년, 소녀들을 자꾸 양산해 내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테러조직의 칼릴, 쌀림 형제도 그렇게 북치는 소년이 된 것이고 찰리 역시 팔레스타인의 테러조직으로 잠입해서 그들의 소위 북치는 소녀 역할을 연기한 것이다.
때로는 분노가 더 큰 분노를 낳게 되고 상대의 전의와 적개심을 상승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에 대한 비판은 이스라엘의 폭격소식을 듣기 전 가디 베커의 백일몽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원죄(?)가 있는 3자이자 관련자이기도 한 영국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사랑
더 리틀 드러머걸은 스파이물이지만 일반적인 장르적 서스펜스물과의 차이점은 바로 찰리 로스와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찰리는 테러리스트 연인 연기를 하는 중에 상대역 모사드요원 가디 베커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러한 설정이 드라마 더 리틀 드러머 걸이 다루고 있는 주제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극한 대립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던져주지는 않지만 인생이라는 험난한 극장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잠깐의 위안과 휴식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 마치 사랑이 인생에서 전부가 아니지만 윤활유가 될 수 있듯이.
- 시리즈명: 더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감독판
- 시즌 No: 1
- 에피소드 No: 6부작
- 방송사: BBC ONE, AMC
- 방영시작일: 왓챠플레이 2019/3/29
- 비고: 왓챠
- 연출: 박찬욱
- 키워드: 스파이, 첩보, 모사드, 테러리즘, 시오니즘, 알 나크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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