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줄거리, 결말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믹 헤론의 슬라우 하우스 시리즈 원작의 애플TV+ 영드 슬로 호시스는 느린 말들이라는 제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초반이 꽤나 지루하다. 마치 문학 소설 첫 장에 있는 엄청나게 재미없고 긴 배경 묘사 글을 읽는 것처럼. 그것만 넘기면 뒤로 갈수록 대화씬도 나오기 시작하고 일사천리로 읽기 수월한데, 대부분 거기서 나가떨어진다. 그리곤 그 소설을 나랑 안 맞아 혹은 노잼이라고 덮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1화와 2화를 볼 때 상황이 그랬다. 물론 책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과감히 그 부분을 건너뛰기 하는 용감한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스파이물인 이 드라마는 그럴 순 없다. 아무튼 1화와 2화는 진심으로 지루했다.
반응이 늦게 오는 영국식 농담
그러면 어떤 점이 초반 이 드라마에 정을 붙이기 힘들게 했을까? 일단 초반 드라마가 서서히 예열하는 동안 이 드라마에서 약방의 감초 격인 영국 농담이 등장하는데, 전혀 감흥이 없었다. ‘코드가 안 맞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문화적 배경 때문에 영국 조크에 반응이 뒤늦게 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경험한 바가 있어서. 드라마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후반부의 농담들은 꽤 재밌었다. 적응 완료.
MI5 요원들의 갱생시설 슬라우 하우스
이제, 본격적으로 내용으로 넘어가서 이 드라마는 영국 내무성의 국내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MI5라는 정보기관을 배경으로 한다. 한국이라면 국정원 국내파트, 미국이라면 국토안보부(홈랜드)이다.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데이비드 카트라이트(조너선 프라이스)라는 MI5 요원이 작전 중 지하철역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근데, 알고 봤더니 이건 시뮬레이션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로 한번 들어가면 복귀하지 못한다는 악명 높은 곳, MI5의 루저들만 모아 놓은 슬라우 하우스로 전출된다.
자, 가봤다니, 허름한 사무실에 웬 잭슨 램(게리 올드만)이라는 술주정뱅이 같은 인간이 책임자이고 그 밑에서 어떤 인물 뒤를 밟는 별 볼일 없는 임무를 맡게 된다. 투덜대면서 일을 하다가 동료인 시드니 베커(올리비아 쿡)와 함께 한 임무 중 시드니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략) 이후로 드라마는 의외로 죄인이 일찍 죄를 실토하고부터 별볼일 없는 일이 큰 일이 되면서 재미가 뒤따른다.
권력기관이 실수를 덮는 과정
애플TV+의 슬로 호시스는 단순히 외부의 적과 싸우는 스파이물이라는 예상을 깨고 MI5 수뇌부 vs ‘잭슨 램과 아이들’ 구도의 내부 권력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정보기관이 하나의 중요한 작전상 큰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덮는 과정 혹은 보기 좋게 포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 이번 일도 그 기관이 내부적으로 덮는, 여러 가지 미제 사건 중 하나가 되어야 할 일이었다. 본 시리즈를 봐도 일개 요원과 정보기관과의 싸움은 참 힘들지 않나. 대부분 “제거” 당하는 수순이다.
그러나, 드라마 슬로 호시스에서 당국의 상대는 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녹록지 않은 인물인 잭슨 램과 그가 이끄는 슬라우 하우스다. 그래서 과연 수뇌부와 척을 진, 궁지에 몰린 잭슨 램과 ‘슬로 호시스’ 아이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까라는 생각이 이 시리즈를 계속 붙잡고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와 게리 올드먼의 연기
드라마의 재미에는 연기자들의 연기가 큰 몫을 담당했다. MI5 부국장 다이애나 태버너 역을 맡았던 영화 레베카(2020) 리메이크에서 멘델리 저택의 집사 댄버스 부인 역으로 나왔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연기가 돋보였고, 개리 올드먼는 초반 그냥 중국집 음식을 개걸스럽게 즐기는 모습에서 국내의 대표적인 먹방씬의 대가들, 하정우나 최민식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반 정을 붙이기 힘들었고 눈에 띄지 않은 슬로 호시스 멤버들도 시리즈가 끝날 때 쯤 엔 전부 각인이 되어서, 첫 번째 시리즈로서 임무를 완수했다.
총평: 슬로 스타터일 뿐 오랜만에 볼만했던 영드
: 1, 2화를 참고 버티면 (Hang in There!) 재미가 따라오는데, 보통 1, 2편까지 재미가 없으면 그 시리즈를 덮는 게 보통이긴 하다. 마지막 6화에 새로운 떡밥으로 시즌 2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다.